우리 집 디지털 카메라의 임자는 큰딸이다.
큰딸이 올 봄 모 전자회사의 디지털 카메라 체험단으로 응모해 뽑혔고
회사에 내준 과제를 완료하고 공짜로 챙긴 것이다.
시가로는 아무리 싸게 사도 삼십만원은 너끈히 하는 것이라
당시 식구들 모두 좋아했었고 큰딸 역시 의기양양했었다.
하지만 카메라의 주인인 딸보다는 나그네인 내가 더욱 많이 사용하고 있다.
처음하는 이야기지만 그 동안 가끔씩 지역지에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사진촬영도 필요한 일이었는데
글은 메일로 보낼 수 있지만 사진은 스캐너가 없어 직접 가져가야 했다.
사진도 메일로 보내고 싶던 차에 디지털 카메라로 가능해졌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처음에는 사진인화료를 생각해 한번 사용할 때마다 사용료를 내마 하고 약속했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사용료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딸이 쓰려면 내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중대사건이 발생했다.
외부 사진촬영은 낮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상대방과의 약속시간이 한낮이라 푹푹 찌는 찜통더위에도 카메라를 준비해서 나갔고
무사히 촬영까지 끝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와 연결해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에 이게 웬일인가..!'
사진기 속에는 내가 찍은 사진은 한 장도 들어있지 않고
딸아이가 찍은 여러 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얼마나 열불이 나는지 큰소리로 딸을 불렀다.
학교과제인 책을 읽고 있던 딸이 영문도 모르고 불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사진이 안 나오느냐,
사진을 저장하고 나면 바로 지울 것이지 왜 그냥 뒀느냐,
어떡하느냐...."
열이 나서 딸에게 연속적으로 '따따따' 퍼부었다.
디지털 카메라는 용량이 한정되어있다.
미리 찍은 사진을 지우지 않으면 더 이상 찍히지를 않는다.
그 동안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고
나는 겨우 전원이 들어오느냐 정도만 확인하면 됐었다.
전원만 있으면 찍을 수 있었고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연결하면 그대로 나왔던 것이었다.
내가 찍은 사진만 컴퓨터에 저장하고 나면 즉시 컴퓨터로 사진을 지우면 됐었다.
정말 한번도 잘못 적이 없었기에 더 이상의 사용법을 배울 생각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디지털 카메라 속의 사진은 컴퓨터로 지울 수도 있고 사진기 자체로도 지울 수 있다,
자신은 항상 사진기로 사진의 유무를 확인한 뒤 찍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엄마도 사용법을 다 아는 줄 알았다.....
딸은 딸대로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어쩔 수가 없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아까 사진 찍으러 간다고 사진기 전원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네가 어제 사진 찍은 일이 있다면
사진기안에 사진을 확인해보라는 소리정도는 해야하지 않느냐,
그리고 사진을 저장하고 나면 곧바로 지우면 편한데 무엇 하러 나중에 지우느냐,
어떻게 너 혼자만 생각하느냐.....
딸은 딸대로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책만 보고 있었으니 그런 소리 해야하는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럼 엄마가 먼저 물어보지 그랬느냐,
어떻게 나만 생각한다고 그러느냐... 등등...
한참 서로 고성이 오갔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결국은 '네가 가서 찍어 와라'는 소리까지 뱉고 말았다.
이 더위에 가지도 않을 딸인 줄 알면서 에구.. 에미란 사람이.....
하지만 어쩌랴,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재촬영해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시간이 조금 흘러 생각해보니 나도 참 염치없는 에미다.
원래 사진기 주인이 누군데.
진작 사용법을 끝까지 알고 사용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제 다시는 사진이 나오지 않아 허둥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사전 점검을 할 것이고 딸 역시 뒤에 쓰는 사람생각을 할 것이다.
오늘 꼭 해야될 것 같았던 사진촬영은 시간을 꼽아보니 내일해도 늦지 않다.
내일가면 될 것을......
-이상은 디지털 카메라맹의 실수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