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딸들을 재촉했다.
"오늘 외할머니 생신이신 데 전화해드리고 학교 가거라"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 큰딸이 통화중이라며 내려놓는다.
아마도 아들네 전화를 받고 계시리라.
좀있다 다시 통화를 시도한 큰딸이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말과 함께 몇 마디 인사를 나누더니 지동생을 바꿔준다.
작은딸도 몇 마디하고서는 이내 날 바꿔준다.
"아이고, 아침에 학교 가느라 바쁠 텐데 전화를 다 하고.."
"아까 통화중이시던데요?"
"오냐, 울진에서 전화 와서 식구끼리 다 인사하느라고 그랬다."
"아침에 뭐라도 해 드세요?"
"그래, 니가 준 용돈으로 고기도 잔뜩 사고, 맛난 거 많이 해먹는다"
고기라니. 엄마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
더구나 혼자 드시겠다고 고기를 사실 양반이 아니시다.
멀리 있는 딸의 걱정을 들어주시느라 그저 하시는 말씀일 게다.
"미역국은 끓이셨어요?"
"더워죽겠는데 무슨 국이냐, 냉국 준비했다"
"낮에 친구 분들이랑 짜장면이라도 시켜 드세요"
아무튼 올해 친정엄마 생신은 이렇게 전화 한통화로 때우고 말았다.
일주일 전 시댁제사에 내려갔다가 가 뵙지도 못하고
남편 편에 부쳐드린 편지 한 장과 용돈이 전부였다.
하기야 엄마 생신을 직접 내손으로 챙겨드린 적이 과연 몇 번이었나.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무 때나 갈 수 있어 생신날 엄마 얼굴이라도 뵙고 올 수 있었다.
동생이 결혼하고 난 뒤에는 당연히 올케가 챙겨드리게 되어 나는 언제나 손님이었다.
그러다 교사인 동생이 멀리 울진으로 발령 받아 가고 난 뒤에는
오고가는 시간이 이곳보다 더 걸린다는 이유로
엄마는 집안 대소사에 무조건 동생네를 못 오게 하신다.
고교교사인 동생도 항상 고3을 맡아 시간이 더욱 없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댁 일에 쫓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마음만 있으면
올케 혼자서라도 충분히 오고 갈 수 있을 텐데 싶었다.
동생과 올케의 무심함에 은근히 화가 치밀어 언젠가 엄마께 말씀도 드렸다.
"엄마가 자꾸 오지 말라고 하면 진짜 올 일이 생겨도 안 와요,
그러니 일부러 오라고는 안 하셔도 지들이 오려고 하면 말리지는 마세요."
"아이고, 오고가며 길에 까는 돈이 얼만데...
그리고 할망구(엄마가 즐겨 쓰시는 자칭)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드는 거, 나는 싫다"
"그건 자식이 당연히 할 일이에요"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 뭘.."
맨날 이런 식이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당신 때문에 힘든 꼴은 못 보신다.
어쩌다 자식들이 쥐어드리는 용돈도 어떤 이유를 달아서건 도로 주신다.
엄마가 보시기엔 아직도 우린 걱정만 끼쳐드리는 어린 자식일 뿐이다.
팔십의 노모가 육십인 아들 나들이에 "얘야, 차조심 해라"고 하였다던가.
동생이 울진에 가고 난 뒤 한 삼년 엄마 생신 때면 혼자서라도 꼭 내려가
내손으로 생신상을 챙겨드리거나 외식이라도 시켜드렸는데
올해는 그것마저도 해드리지 못했다.
평생 골골하시며 건강치 않게 사신 엄마.
지금도 정기적으로 종합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셔야 한다.
그 검진 때도 늘 당신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야 하시는 엄마.
만나 뵐 때마다 쇠잔해지시는 엄마가 늘 마음이 아프다.
딸은 출가외인이니 어쩌니 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뿐인 아들마저 늘 멀리 두고 사셔야 하는 엄마.
그게 당신의 운명이란 걸 예전에 알아차리시고 홀로 사시는데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시는 엄마.
가끔 아이들이 다리라도 주물러 드리려고 하면 "놔둬라, 팔 아프다"하신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시다.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팔다리 주물러주면 왜 안 좋겠느냐만 어차피 혼자 살면서
그런 좋은 맛들이면 혼자 살기 싫어질까 겁난다"
나는 나대로 "지금부터 싫든 좋든 한집에서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거지,
늙고 병든 시어머니를 어느 며느리가 좋아하겠느냐..."
엄마는 당신이 정말 힘이 없어 혼자 못살 때가 아니면 절대 아들과 함께 살지 않을 거라고 하신다.
아무튼 병적일 정도로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하시는 엄마.
지금만큼만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하지만 이 딸이 늘 이런 생각을 못하고 아주 가끔씩 엄마 생각을 해드린다는 것을 아실까?
제 살기에 급급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