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치를 담근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어슬픈 솜씨로 배추와 싸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배추김치가 떨어진지가 한참인데도 부추김치로 겨우 식탁을 달래가며 지내다가 쇼핑길에 생각지도 않게 배추를
산 것 부터가 화근이었다.
무슨일이든지 계획해가며 규모있게 살아야하는데 게으름 때문에 계획없이 살다가 큰코 아닌 짧은 손가락
다친꼴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즐기던 늦잠도 자지않고 일어나 아침밥도 먹기 전 하품을 해가며 배추를 잘랐다.
항상 배추를 손질할
때마다 밑둥 자를 때는 긴장을 하며 조심하는데 이날은 정말 무심코 잘랐다.
무심코 칼질을 하는데 '어쿠나!'싶은 생각이 들었고 짧은 비명과
함께 무의식중에 왼손 검지를 꽉 잡았는데 잡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흐르는게 아닌가!
거실에서 TV를 보고있던 남편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는 허둥지둥 약상자를 찾고 아이들도 덩달아 "엄마!"하며 허둥댄다.
우선
지혈을 해야겠기에 머리 위로 손을 쳐들고 남편에게 "끈 좀 찾아줘요!"했더니 그 끈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몰라 더욱 허둥지둥이다.
간신히 찾은 팬티고무줄로 검지 아랫부분을 꽉 잡아맸더니 그제서야 피가 멈추었다.
조심스럽게 오른 손을 떼고 상처부위를 살펴보니
검지 둘째마디가 V자 형으로 깊이 베인 것 같았다.
일요일이라 병원도 휴진일거고 그렇다고 응급실까지 갈만한 상처는 아닌 것 같아 우선
소독을 하고 후시딘을 잔뜩 바른 후 붕대로 감쌌다.
조금 지나니 꽉 잡아맨 고무줄 때문에 손가락 끝이 거무스럼해져 고무줄을 풀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더니 한동안
두텁게 맨 붕대겉으로 피가 베어 나왔다.
계속 출혈이 되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얼마후 지혈이 되었다.
배추 3통을 한통도 제대로 자르지 못하고 일이 났으니 이제 김치는 누가 담근단 말인가.
평소 집안 일이라면 손하나 대는 일이
없는 남편이라 "김치 못 담그면 사서 먹지"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칼을 들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었다.
어쨌든
이날 남편은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부추까지 다듬어 양념을 만들고 김치까지 완성시켰다.
물론 성한 한손만 가지고 잔소리로만 거든 나의 활약도
있었지만 평소의 남편으로서는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을 한 셈이었다.
더욱이 종일 밥이며 반찬이며 설거지까지 하고 (딸이 하기도 했지만)항생제 사러 일요일날 여기저기 약국까지 찾아
다녔으니.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내가 꺼낸 말.
"어슬픈 마누라 때문에 당신 출세 했네, 김치까지 담글줄
알게 되고"
평일 아무도 없는 날이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날 사고가 나서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본의아니게 앞으로
여러 날 억지로 편한 신세가 될성 싶다.

'♡ 아 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0) | 2000.05.30 |
---|---|
코믹드라마 "이혼" (0) | 2000.05.30 |
손가락 부상 후유증 (0) | 2000.05.27 |
한손으로 머리감기 (0) | 2000.05.23 |
담배와 손가락 (0) | 2000.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