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女子)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기억의 서랍에 차곡차곡 담아봅니다

별보다 더 반짝이는 그대

♡ 엄마(친정엄마)♡

피같은 돈!돈!돈!

bell-10 2001. 2. 3. 16:30




수능을 마친 큰 딸이 특차에 꼭 합격할거라며 논술준비도 않고
지난해 12월 초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벼룩시장, 가로수 같은 광고물을 집안에 가득 펼쳐놓고
이잡듯 구인광고를 뒤적이곤 하더니 결국 자리를 얻게 되었다.
집에서가까운 곳도 아닌 강남의 모 피자집.
시급이 2천원이고 오후5시부터 11시까지 6시간 일하는 조건이라고 했다.

딸애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돈벌이였고
피자를 밥보다 좋아해서인지 선뜻 다닌다고 말했을 때
부모 입장으로는 '너무 멀다, 너무 늦다, 남의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차라리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게 낫다.... '는 등등의 말로 만류를 했지만
그동안 적은 용돈에 갈증을 느꼈던 아이를 말리기가 수월치 않았다.
이틀만 일하면 한달치 용돈보다 더 생기는 일을 놓칠수가 없다고 했다.
(참고로 딸의 한달 용돈은 2만원. 물론 승차권이나 문제집은 사주는 조건이었으니
그돈은 순수하게 군것질이나 사교상의 경비입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좋은 경험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허락을 했다.
고3이라 학교에서 매일 밤12시는 되어야 오던 아이지만
학교와 강남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첫날은 엄마인 내가 더 초조했다.
버스 한번만 타면 오고가는 코스지만 정류장에서 집까지 10분 정도는 걸어야 했고
늦은 밤 혹시 취객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이는 더 씩씩해서
마중나가겠다는 나를 말리고는 무사히(?) 밤늦은 귀가를 했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 내게 너무 재밌다고 답하는 딸.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쓸고 닦고 나르고 인사한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딸.
특히 저녁도 피자로 먹었다며 싱글벙글하는 딸애의 얼굴은 정말 밝았다.
6시간 내내 서서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터라 '얼마나 가나 두고보자' 싶었는데
사흘쯤 지나자 딸애의 입에서 서서히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다, 캔을 따다가 손을 베었다,
종이상자를 접다가 오늘은 이손이 다쳤네, 내일은 저손이 다쳤네.....
그런 말 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을 쳤더니
'그래도 어떻게 금방 그만둔다고 하느냐, 최소한 한달은 다녀야 덜 미안하지'라며
약간의 책임감을 내비쳐 보였다.
저도 일말의 양심은 있나부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늦게 귀가한 딸이 다리가 아프다며
"엄마, 나 너무 힘들어서 월급타면 아까워 못쓸 것 같아요,
피같은 내돈!"이라고 하길래
두말않고 "알았다, 그 피같은 돈을 우째 쓸래?
엄마가 유리상자 맞춰 줄테니까 그속에 넣어 대대손손 보존해라"고 맞장구쳤다.

여태껏 아빠가 주는 용돈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적다고 투정하며 받아 썼을텐데
저도 이제는 돈버는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 걸 알았을테지.
아빠의 수고도 조금은 알았겠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르바이트 덕에 성탄이니 연말이니 다른 아이들이 들떠있을 시기에
피자집 잔일로 조용히 지낸 딸이다.
지난 12월31일날.
연말이라 손님이 많았는지 30분 더 일하고 온 딸이 자정을 5분 넘겨 귀가했을때
작은 딸아이가 한마디 했다.
'언니, 작년에 나가서 왜 올해 와!"라며.
거기다 한술 더떠서 엄마인 나는
"너 20세기에 집 나갔다가 21세기에 걸쳐 들어왔네" 하며 한바탕 웃었다.
진정한 21세기의 시작은 2001년이 맞잖는가!!

그 딸이 특차에 떨어지고 논술이 발등의 불로 다가왔을 때
핑계삼아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다.
사실은 핑계가 논술이지 진작부터 손에 상처가 많이 나서 싫다고 한 공주병 증세때문이었다.

아무튼 3주 남짓한 아르바이트 보수가 20만원이 넘는다며
이쁜 옷도 사입고 어쩌고 하며 꿈에 부풀어있는 딸에게
'첫 월급타면 뭐하는 지 알지?'라며 은근히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나의 아이디어.
"엄마에게는 아무것도 안해줘도 된다.
설에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 용돈을 드리면 어떻겠니?"라고 했더니
펄펄 뛰는 딸.
얼마되지도 않는 돈으로 그러고 나면 자기는 뭘 쓰느냐며 계속 펄펄 뛰었다.
'에구, 저게 몰라도 한참 몰라, 조금만 투자하면 더 많은 이익이 생길텐데....'
하는 컴컴한(?) 생각을 밀치고 "싫으면 말고"하고는 말았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난 딸이 엄마말대로 하겠단다.

그런 마음이 이뻐서 딸아이의 옷은 내가 사주었다.
메이커 타령을 않는 아이라 함께 동대문시장에 갔더니
백화점 외투 반벌 값에 외투며 티셔츠며 청바지까지 좌악 빼입힐 수 있었다.
그날 물건값 에누리한 돈으로 늦은 시간 시장근처 분식집에서 우동이며 라뽂기를 먹었다.
항상 아이 셋을 데리고 다녔는데 맏딸과의 이런 외출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가며.

이번 설에는 딸애의 보수 절반가까이 투자한 덕인지
등록금에 보태쓰라며 어른들이 주신 돈이 더 많았다.
늦게라도 딸애가 엄마의 얄팍한 꼼수는 눈치채지말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효도했다고만 알기를 바랄뿐이다.
어쩌면 벌써 나의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딸애의 효심을 가상히 여긴 하늘의 뜻인지
딸애는 서울H대에 차석으로 붙었답니다.
등록금이 70%나 면제되는 뜻밖의 횡재지만 마음놓고 기뻐할 수가 없어요.
떨어진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조심스러울 뿐이네요.
이 자리를 빌어 조심스럽게 기쁜 마음을 드러냅니다.
독자님들, 너무 푼수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