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이 되던 해 가을 드디어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사실 남들 다하는 운전이었지만 大路에 대한 공포증이 약간 있어
그때까지 운전은 생각도 않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자전거를 배웠는데 학교운동장에서는 멀쩡히 잘 타다가도
길에만 나서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다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아 그만 서버리곤 했습니다.
조그만 자전거도 못타는 내가 하물며
덩치큰 자동차를 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77년도 운전면허 소지자인 남편도 예전부터 저더러 운전배우라고 했었고
같은 나이의 동네엄마들도 모이면 반이상은 운전면허를 딴 실정이었지만
저는 아예 '운전은 절대 못한다. 나중에 기사 쓰면 되지, 뭐'하며
되지도 않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그러다 사십이 되던 그해 초 시댁에 가니
시아버님께서 운전면허 땄는지를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말았는데
다음에 또 물어보시고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뵐 때마다 물어보시는데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그 당시 시댁식구들 중
시어머니와 우리 두 며느리(그리고 보니 다 며느리네요)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다섯이나 되는 시누 내외까지 모두)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이야 연세가 드셨으니 제외하게 되고
며느리중 맏이인 제가 궁금하셨던가 봅니다.
남들 다하는 운전을 아직도 못하나 하신 거지요.
아버님의 그 말씀이 저에겐 약이 되어 그해 가을 학원등록을 하였습니다.
당시 네 살이던 막내아들을 데리고 아파트 부녀회관에서 필기시험 준비를 했지요.
강의도중 설치는 아이를 조용 시키느라 정말 혼났습니다.
다행히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고만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두셋 더 있어 마음이 덜 불편하더군요.
필기시험을 치르던 날.
이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떨리는 시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학창시절 시험 속에서 살았는데도
가슴은 두근두근, 싸인펜을 쥔 손은 덜덜.
얼마나 떨었는지 나중엔 턱이 다 아플 정도였습니다.
커트라인을 겨우 맞추어 필기는 통과되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은 없고 천방지축인 아들을 데리고
운전 연습하러 갈 수는 없고....
하는 수없어 새벽잠이 많은 제가
아이들이 자는 시간인 새벽반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집과 가까운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출근하기 전 새벽마다 운전 연습하는 학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10월이라 어두컴컴할 때 학원에 가서는 얼른 연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드디어 시험날이 닥쳤습니다.
무슨 큰일이라고 남편은 회사를 쉬면서까지 아이를 봐주었습니다.
같이 시작한 스물다섯명이 함께 새벽같이 시험장엘 갔었습니다.
일차로 코스시험장.
미리 들은 이야기대로 떨리지 않게 청심환도 먹었고
쌀쌀할 때라 옷도 두텁게 껴입었지만
순서가 뒤쪽이어서 먼저 시험보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덜덜 떨렸습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데 합격하는 사람보다는
중간에 삐익!하며 불합격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이를 어쩌나!!
드디어 제 차례.
S자 코스는 조심조심 겨우 마쳤는데 너무 떤 나머지
T자에서 시동을 세 번이나 꺼뜨렸습니다.
이젠 틀렸구나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는데 다행히 합격이라지 뭡니까.
이런 고마울 데가.
코스시험에서 떨어진 이들은 먼저 귀가하고
반정도가 남아서 주행시험을 기다렸습니다.
첨부터 저는 주행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원에서 연습할 때도 강사가 저더러 주행을 잘 못한다고 했거든요.
어차피 운전면허는 두세 번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시작했으니
단번에 합격이란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주행시험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먼저 시작한 사람이
벽에 완충역할을 하게 붙여둔 타이어를 들이받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렇잖아도 불안해하던 사람들을 더욱 불안해지게 만든겁니다.
멀리서 주행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합격여부를 알 수 있을 만큼 합격한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두팔을 치켜드는 사람, 동료를 끌어안는 사람,
그 자리에서 펄쩍 뛰는 사람, 손뼉을 치는 사람.....
그 순간 너무나 부러운 모습들이었지요.
반면에 불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고 축 처진 모습으로 나왔고요.
나도 저렇게 처진 모습이겠구나....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덜덜 떨면서 전방을 주시하였고
신호와 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방에 있는 신호등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소위 말하는 돌발신호가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주행선이 2차선이어서
차선마다 보는 신호등이 따로 있었다는데
저는 남의 차선에 있는 신호등만
눈이 빠져라하고 쳐다본 것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힘겹던 시험이 끝나고
'이젠 떨어졌구나'하며 차에서 내리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더군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000번, 24점으로 합격"이란 멘트가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제 귀를 의심했었습니다.
꿈인가 사실인가 하고 있는데 일행이 뛰어와 반겨주는 걸 보니
합격이 맞긴 맞았습니다.
24점까지가 합격커트라인이었으니 얼마나 운수대통입니까?
이래서 모든 시험은 운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이렇게 얼떨결에 단번에 합격을 했는데
그날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은 세명뿐이었습니다.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우리 세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이들 마냥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갑자기 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있는 남편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찡해 왔습니다.
누가 그순간 제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소감을 물었다면 자신있게
"모든 영광은 남편에게 돌리고 싶어요"라고 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정말 남편 덕에 아이와 관계없이 새벽에 연습을 할 수 있었고
오늘도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있던 남편도 오후 늦게까지 소식이 없는 제가
합격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불혹의 나이가 되면서 제가 한 일 중 가장 큰 일이 운전면허 취득이랍니다.
사실 남들 다하는 운전이었지만 大路에 대한 공포증이 약간 있어
그때까지 운전은 생각도 않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자전거를 배웠는데 학교운동장에서는 멀쩡히 잘 타다가도
길에만 나서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다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아 그만 서버리곤 했습니다.
조그만 자전거도 못타는 내가 하물며
덩치큰 자동차를 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77년도 운전면허 소지자인 남편도 예전부터 저더러 운전배우라고 했었고
같은 나이의 동네엄마들도 모이면 반이상은 운전면허를 딴 실정이었지만
저는 아예 '운전은 절대 못한다. 나중에 기사 쓰면 되지, 뭐'하며
되지도 않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그러다 사십이 되던 그해 초 시댁에 가니
시아버님께서 운전면허 땄는지를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말았는데
다음에 또 물어보시고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뵐 때마다 물어보시는데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그 당시 시댁식구들 중
시어머니와 우리 두 며느리(그리고 보니 다 며느리네요)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다섯이나 되는 시누 내외까지 모두)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이야 연세가 드셨으니 제외하게 되고
며느리중 맏이인 제가 궁금하셨던가 봅니다.
남들 다하는 운전을 아직도 못하나 하신 거지요.
아버님의 그 말씀이 저에겐 약이 되어 그해 가을 학원등록을 하였습니다.
당시 네 살이던 막내아들을 데리고 아파트 부녀회관에서 필기시험 준비를 했지요.
강의도중 설치는 아이를 조용 시키느라 정말 혼났습니다.
다행히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고만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두셋 더 있어 마음이 덜 불편하더군요.
필기시험을 치르던 날.
이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떨리는 시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학창시절 시험 속에서 살았는데도
가슴은 두근두근, 싸인펜을 쥔 손은 덜덜.
얼마나 떨었는지 나중엔 턱이 다 아플 정도였습니다.
커트라인을 겨우 맞추어 필기는 통과되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은 없고 천방지축인 아들을 데리고
운전 연습하러 갈 수는 없고....
하는 수없어 새벽잠이 많은 제가
아이들이 자는 시간인 새벽반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집과 가까운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출근하기 전 새벽마다 운전 연습하는 학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10월이라 어두컴컴할 때 학원에 가서는 얼른 연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드디어 시험날이 닥쳤습니다.
무슨 큰일이라고 남편은 회사를 쉬면서까지 아이를 봐주었습니다.
같이 시작한 스물다섯명이 함께 새벽같이 시험장엘 갔었습니다.
일차로 코스시험장.
미리 들은 이야기대로 떨리지 않게 청심환도 먹었고
쌀쌀할 때라 옷도 두텁게 껴입었지만
순서가 뒤쪽이어서 먼저 시험보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덜덜 떨렸습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데 합격하는 사람보다는
중간에 삐익!하며 불합격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이를 어쩌나!!
드디어 제 차례.
S자 코스는 조심조심 겨우 마쳤는데 너무 떤 나머지
T자에서 시동을 세 번이나 꺼뜨렸습니다.
이젠 틀렸구나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는데 다행히 합격이라지 뭡니까.
이런 고마울 데가.
코스시험에서 떨어진 이들은 먼저 귀가하고
반정도가 남아서 주행시험을 기다렸습니다.
첨부터 저는 주행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원에서 연습할 때도 강사가 저더러 주행을 잘 못한다고 했거든요.
어차피 운전면허는 두세 번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시작했으니
단번에 합격이란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주행시험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먼저 시작한 사람이
벽에 완충역할을 하게 붙여둔 타이어를 들이받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렇잖아도 불안해하던 사람들을 더욱 불안해지게 만든겁니다.
멀리서 주행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합격여부를 알 수 있을 만큼 합격한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두팔을 치켜드는 사람, 동료를 끌어안는 사람,
그 자리에서 펄쩍 뛰는 사람, 손뼉을 치는 사람.....
그 순간 너무나 부러운 모습들이었지요.
반면에 불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고 축 처진 모습으로 나왔고요.
나도 저렇게 처진 모습이겠구나....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덜덜 떨면서 전방을 주시하였고
신호와 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방에 있는 신호등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소위 말하는 돌발신호가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주행선이 2차선이어서
차선마다 보는 신호등이 따로 있었다는데
저는 남의 차선에 있는 신호등만
눈이 빠져라하고 쳐다본 것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힘겹던 시험이 끝나고
'이젠 떨어졌구나'하며 차에서 내리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더군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000번, 24점으로 합격"이란 멘트가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제 귀를 의심했었습니다.
꿈인가 사실인가 하고 있는데 일행이 뛰어와 반겨주는 걸 보니
합격이 맞긴 맞았습니다.
24점까지가 합격커트라인이었으니 얼마나 운수대통입니까?
이래서 모든 시험은 운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이렇게 얼떨결에 단번에 합격을 했는데
그날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은 세명뿐이었습니다.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우리 세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이들 마냥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갑자기 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있는 남편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찡해 왔습니다.
누가 그순간 제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소감을 물었다면 자신있게
"모든 영광은 남편에게 돌리고 싶어요"라고 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정말 남편 덕에 아이와 관계없이 새벽에 연습을 할 수 있었고
오늘도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있던 남편도 오후 늦게까지 소식이 없는 제가
합격했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불혹의 나이가 되면서 제가 한 일 중 가장 큰 일이 운전면허 취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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