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만난 중. 고교 6년 동기동창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두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의 아줌마들이라 하는
이야기는 뻔했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난 뒤 30여년 전 학창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별난 아이였던 내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참 별난 아이였단다.
점심 도시락 먹을 때만.
나는 거의 기억이 희미한 데 친구 이야기가 같이 잘
놀던 내가 점심시간만 되면 변했단다.
책상가운데 자주색 가방을 가려놓고 혼자서 밥을 먹더라는 것이다.
자기들끼리는 내 이야기를
하였다는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니 지난 시절의 내가 아련히 떠올랐다.
칠 남매의 맏이인 아버지의
맏이며 외동딸로 태어난 나는 당시 대가족으로 같이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나는 어릴 때 몸이 많이 약해 늘 부모님의 걱정
속에서 살았다.
돌도 되기 전 겨우 앉아 놀 때쯤에 강냉이에 스며든 양잿물을 먹는 사건이 발생해 하마터면
이 세상을 하직할 뻔도 했고.
(옛날에는 강냉이 장수 아줌마들이 함지 속에 강냉이랑 양잿물을 함께 넣어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는데 날씨가 더워 녹아 내린 양잿물이 강냉이에 스며들었다고 추측함)
그래서인지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동네에
감기가 왔다하면 내가 제일 먼저 걸렸고
걸렸다 하면 폐렴으로 진행될 정도로 허약체질이었다고 한다.
강태공인 할아버지께서 낚시하다 어쩌다 잡으신 자라의 생피며 삶은 고기는 당연히 몸이 약한
내 차지였고 삼촌들이 뒷논에서 잡은 참개구리의 뒷다리도 당연히 내 몫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요즈음 강장제로 통하는 그런 것들을 어릴 때 수도 없이 먹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과는 거리가 멀게 건강하게 살아왔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 때는 보온도시락도 없었다.
우리 엄마는 점심때면 뜨거운 밥을
금방 지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로 배달하셨다.
다른 식구는 잘 먹어보지도 못하는 장조림 같은 맛있는 반찬을 곁들여서.
입이 짧아 잘 안 먹는 내게 밥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서 엄마는 정성을 들이셨다.
그 때는 엄마의 정성도 모르고 밥을 남겨가기 일쑤였고.
지금 나도 엄마가 되고 나니 자식들이
밥을 잘 안 먹는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서 밥그릇을 들고 따라 다니게 되는 엄마의 심정.
어쨌든
엄마의 지극정성으로 중학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건강해 지기 시작했고
나를 먹이기 위한 우리 엄마의 지극정성도
주춤해졌다.
그런데 내가 학창시절 별난 아이인 것은 식생활 습관 때문이었다.
철들고나서 남동생 둘과 다섯 식구인 우리 집은
엄마의 깔끔 때문에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 우리들의 수저 및 밥그릇도 항상 제것이 있었다.
제것 아닌 그릇이나 수저는 사용하지도 않았고 다른 식구들이 남긴 밥은 먹지도 않았고.
우리엄마는 당신이 잡수시지 않으니 우리에게
먹으라고 하시지도 않았고
우리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컸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가 일부러 따뜻한 밥을 지어 갖다주신 도시락을 남긴 이유 중의
하나도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면 다른 친구들의 젓가락이 왔다 간 내 반찬은 먹지 않으니
반찬이 없어서 일 수도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도시락을 먹으면 반찬은 나눠먹는 게 당연한 데
나는 친구들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젓가락이 내 반찬에 닿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침도 함께 묻어 있을 것이라 불결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지만 그 때는 친구들에게 먹지 말란 말은 하지 못하고
결국 반찬을 먹지 않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나의 이런 식습관은 중. 고교 때도 마찬가지라 결국 친구들과 도시락을 같이 먹지 않는 것으로
발전하였으니 친구들이 별난 아이라고 기억하는 건 당연지사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편과 결혼 후 삼개월동안
시댁에서 살았는데 남편형제는 일곱이라서인지
할머니, 시부모님의 수저 외엔 모두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남이 먹던 수저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내 눈에 제일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눈 찜을 해 둔 것이다.
식사 때만 되면 그 수저를 찾아 내가
차지하는 것이 일이었다.
또 제사 때나 어른 생신 때면 온 가족이 다 모이는데 식사 때가 되면 제일 큰 형님이 나물 무친
큰 양푼에다 니밥 내밥 없이 다 갖다 부어 비벼서 같이 둘러앉아 함께 수저를 넣어 먹는데
정말 환장할 일이었다.
그래도 별난 올케라는 말은 듣기 싫어 내색도 못하고 한 두 숟갈 뜨고는 말았다.
그 다음 연구해 낸 것이 비비자 말자 내 몫을 재빨리 덜어내는 일.
'조금만 먹을게요'라고 하면서.
아마 그 때 시댁 식구들도
나의 이런 별난 면을 조금은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별난 아이였던 나도 한 집안의 며느리, 한사람의 아내,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오면서 차츰 변해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와도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우리 가족이 아닌 사람과는 한
그릇을 같이 쓰지는 못한다.
나의 이런 식습관이 살아가는데 아무 도움은커녕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아이들은
별나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했다.
밥 먹을 때 물 컵을 하나만 꺼낸다든지, 식구가 먹다 남은 밥을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먹게끔
준다던가.....
나의 이런 노력(?) 덕에 우리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로 컸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튀지 않는.
별난 엄마가 키웠는데
별나지 않게 커 준 내 아이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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