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어떤 할머니

bell-10 2001. 11. 18. 09:21


"할머니, 뜨거운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아이고, 고맙게도...."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의 뜨거운 물로 태워드린 유자차 한잔에
그 할머니께서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사무실에서 분리수거를 하다보니 신문지는 가지런히 모을 수 있는데
이런 저런 종이류는 처치가 곤란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큰 박스에 일단 종이를 모았다가
박스째 분리수거날 내놓는 거였다.

쓰레기 봉투 값이 유난히 비싼 이곳 수원은
대부분 지역에서 스무개짜리 한 묶음씩 파는 20리터 짜리 봉투도
이곳에서는 열 개씩 반으로 나눠 판매하고 있을 정도다.
나눠 산다해도 그 금액이 자그마치 일 만원이나 드는 거금이다.

사무실에서 주로 발생하는 종이류 쓰레기를 아무리 꾹꾹 눌러 담는다 해도
그 처리비용이 만만치 않아 보여 출근 초기부터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광고전단지는 물론 편지봉투 한 장이나
가위로 자르고 생긴 조그만 종이 조각까지 따로 보아보니
일반 쓰레기 봉투는 한 달에 한 장도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은 워낙 큰 박스에 모으는 중이라
4층 사무실에서 1층까지 어떻게 운반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꽁꽁 묶은 후 계단에서 굴려가야 하나, 아니면 4층 창문으로 내던져야 하나.....

그러던 중 한 할머니가 매주 고정적으로 신문을 수거해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종이류도 가져가시는가 여쭤보니
"가져가고 말고. 이렇게 하면 쓰레기 봉투도 안 들겠수"하셨다.
각층 사무실에서 신문을 모아줘서 가져가기 때문에
층마다 내다놓는 병이나 플라스틱 등 재활용품도 가끔 치워주고 있다고 하셨다.

어차피 내다버려야 하는 것들인데 할머니께서는 힘들어도 용돈벌이가 되셔서 좋고
우리들은 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가져가실 때마다 박스가 미처 차기도 전 그때그때 종이를 치워주셨다.

그러던 중 어쩐 일인지 한참동안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다.
복도에 내다놓는 신문은 가끔 없어지는데 박스의 종이는 쌓여만 갔다.
'어쩐 일이 실까? 날씨가 추워져 몸살이라도 나셨나?'
급기야 박스의 종이가 차고 넘쳐 내일이면 그냥 내다버릴 판이었는데
드디어 할머니께서 등장하신 것이었다.

"잘 있었수?"하고 나타나신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반가웠다.
"어디 편찮으셨어요? 아님 어딜 다녀오셨어요?"
"아니, 몇 번 왔는데 사무실 문이 닫혀 있었다우"
정말 공교롭게도 아주 가끔 사무실을 비워둔 그 시점에 다녀가신 거였다.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 할머니께서는
종이가 가득 들어있던 박스를 깨끗이 비워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건네 드린 따뜻한 차 한잔에
오히려 더 고마워 하시는 할머니께 그동안 궁금했던 몇 가지를 여쭤보았다.
"집은 어디세요? 이렇게 한달 정도 힘들게 하시면 용돈이 얼마나 생기세요?"

집은 사무실과 그리 머잖았지만 한 달에 겨우 오만원 벌이라고 하셨다.
며느리가 못하게 말려도 며느리 모르게 하신다는 할머니.
그 분이 우리 시어머니나 친정엄마라면 나는 어떻게 말했을까?
'하지 마세요'라고?
아님 '해보세요'??

우리 엄마랑 비슷한 연세이실 것 같은 그 할머니를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그깟 돈 몇푼 안되는 양말 뒤집는 일을 하신다기에 얼마나 말렸던가.
아무리 말려도 고집을 부리며 그 일을 하시는 울엄마.
"사지 멀쩡한데 놀면 뭐하누...."하시던 울엄마.
어쩜 우리 모르게 또 다른 일을 하시는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