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10 2001. 5. 13. 23:00



'5월'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
라일락, 아카시아, 신록, 가정의 달, 결혼기념일, 5.16, 광주항쟁,,,,,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환희에 찬 단어들이나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도 생각나는 5월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가장 가슴아픈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내동생'이다.

올해로 동생이 죽은 지 꼭 이십 년이 된다.
나하고 두 살 터울이었으니 살았다면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신사일텐데,,,,
어릴 때부터 '그 녀석 참!'하는 찬사를 주위 분들에게 유난히 많이 들은 동생이었다.
성격 좋고, 인물 좋고, 공부 잘하고,,,
단지 흠이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8톤 트럭에 치어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히 다른 곳은 다 멀쩡했는데 한쪽 다리 정강이 부분만
완전히 짓이겨졌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었다.
삼십 년도 훨씬 전인 그때만 해도 의술이 덜 발달해서인지
여름살이라 썩어 들어가는 다리를 의사는 자르자고 했고
엄마는 당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안 된다고 버티셨다.

삼년을 꼬박 병원생활을 하며 엄마의 지극정성을 다한 간호와 기도 덕인지
다행히 동생은 겉으로는 멀쩡해졌다.
하지만 깊게 패인 상처로 인해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긴 바지를 입고 다녔고
뼈만 겨우 덮인 그 상처로 인해 엄마는 밤낮으로 동생을 걱정하고 사시게 됐다.
사고를 낸 운전사가 지지리도 가난했고 우리 역시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피부이식 수술을 하지 못해 깊게 패인 그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했다.

그 이후로 오토바이 사고를 또 당해 그 다리를 두 번이나 더 부러뜨린 동생.
그때마다 엄마는 초주검이 되셨다.
결국은 81년 5월 14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구근교 경산역에서 일어난 열차추돌사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한 그 참사로 내동생도 이 세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그때 동생나이 25살.
대학 무선통신학과를 졸업한 꿈 많고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여자친구와 부산까지 여행을 갔다가 오는 길에 당한 참사로 한날한시 함께 간 두 사람.
천생연분이었을까?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즐겁게 지내다가 저 세상 길도 함께 간 두 사람이다.

동생의 유해가 안치된 병원을 찾은 그날 엄마는 혼절하셨고 아버지도 울부짖으셨다.
우리 식구들 중 동생의 주검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우리 막내(지금은 하나뿐인 내동생)만이 안치소에 들어가 제형임을 확인하고 나왔다.
제대로 못봤지만 구두를 보니 형이 틀림없다며 울부짖던 막내동생.
엄마와 아버지를 들어가지 못하게 말리는 동생을 보며
얼마나 처참한 모습으로 갔는지 그저 짐작했을 뿐이었다.

동생은 부모님의 뜻대로 할머니가 계신 옆에 매장되었다.
장례식날 유난히 작은 관을 보며 그 큰 키가 저만할 리 없다며 다시 가슴을 쥐어뜯으시는 엄마.
너무나 큰 참사였으니 시신인들 온전했을까?
우리 집은 카톨릭이라 집안 어른들이 아시면 큰일날
두사람의 영혼결혼식에 엄마와 나만 참석하기도 했다.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안드레아 연미사 넣으셨어요?'
'오냐, 이래 전화 해주니 고맙구나'
'미사시간이 언제예요?'
'아이고, 오지 마라, 오며가며 길바닥에 깔 돈이 어딨다고,,'
요즘 우리 형편이 좋지않다며 자꾸 걱정하시는 엄마 신지라
지난주 다녀갔는데 왜 또 오느냐며 극구 말리신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식사도 제대로 못하실 정도로 가슴아파 하시는 엄마께서
이번엔 날짜도 잊어버릴 뻔했다며 웃으셨다.
정말 세월이 약일까?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대못으로 박힌다는데 정말 괜찮으신 걸까?

지금도 친정에 가면 이십여 년전 그 청년이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들이 있다.
비록 색은 바래었지만 풋풋한 젊음을 간직한 사진이다.
엄마는 동생이 보고싶을 때마다 그렇게 사진들을 보시며 차츰 망각을 배우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