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7년전 일기(제목:소중한 내동생)
bell-10
2003. 12. 22. 09:58
추운 날씨 탓인지 온 식구가 집안에서 뒹군 일요일.
모처럼 아이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동네 이야기가 나왔고
친하게 지내던 이웃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지나간 일이 하나 떠올랐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하고 말했더니 큰딸은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하는데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나머지 두 아이는 전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그 당시 일기를 꼬박꼬박 쓰던 작은딸의 일기장이었다.
큰딸이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일기내용을 다같이 들어보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지면서 다시 콧등이 시큰해져왔다.
아들이 없어져 난리를 피웠던 그날의 사건이 기록된 작은딸의 일기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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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7일 화요일 날씨: 해>
제목: 소중한 내동생
5교시 실과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현주가 날 불렀다. 밖에 누가 왔다는 것이다.
카네이션 만들기를 하다가 불려서 좀 싫은 표정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앞엔 규동이와 지호가 있었다. 지호는 울고 있었다.
일단 교실로 데려와서 물어보니 엄마가 206호에 있는데
206호가 어딘지 몰라 왔다는 것이다.
정말 웃긴다. 아니 어처구니가 없다. 엄마가 없어서 학교에 오다니..
규동이는 다 말하고는 “엄마가 없어!”하며 결국은 울었다.
다행히 수업이 아닌 카네이션 만들기라 나는 일어서고 규동이를 의자에 앉혔다.
청소는 선생님께 말씀드려 조금만 하고 지호와 유미와 집에 가려고
교문을 나서려는데 규동이가 자전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산길을? 그것도 비탈길을 어떻게?’
결국 짐을 바구니에 싣고 집에 갔다. 낑낑대며 말이다.
자전거 때문에 4동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 5동 앞에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규동이는 자전거타고 빨리 가고 지호도 막 뛰어갔다.
거기에 지호 아줌마와 엄마가 계셨다.
아줌마는 지호를 잃어버린 줄 알고 우셨는지 눈이 시뻘겋게 되어 있었다.
규동이도 지호도 엄마도 아줌마도 서로 찾는데 은영이는 청소가 아니라
먼저 와 말씀드렸다고 했다.
정말 대단하다.
엄마는 규동이를 혼내고 꼭 안아주셨다.
아줌마도 눈이 충혈 되어 지호를 꼭 안아 주셨다.
집에 와서 엄마는 궁금하다는 듯이 말하셨다.
“어떻게 애들 둘이서 자전거를 끌고 그 산길을 올라갔을까?”
정말 규동이는 소중한 동생이자 엄마의 아들이다.
어버이날 전 날 이런 일이??
(*등장인물 설명: 유미-지호누나이며 작은딸과 한반, 은영-같은 동에 사는 한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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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같은 동에 사는 아줌마 몇이서 점심을 먹은 그날
206호가 자기집에 행운목 꽃이 폈다고 자랑을 했다.
60년 만에 한번 핀다는 행운목 꽃을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우리는
구경하러 가게 되었고 집안 가득한 행운목 꽃향내를 맡으며
느긋하게 차도 한잔 마신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던 아이 둘이 없어진 것이다.
6살인 우리 규동이도 늦둥이였지만 3살인 지호는
지 누나와 열 살 터울의 정말 귀한 늦둥이였었다.
두 시간 가까이 아파트 안은 물론 아파트 뒤 산기슭에 있던 학교까지
샅샅이 찾아 헤매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급기야 파출소에 신고까지 했었다.
누나 교실까지 찾아갔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이가 둘씩이나 울며 찾아온 걸 보신 담임선생님은 또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거의 사색이 되다시피 길가에 퍼져 앉아 있는데
먼저 집으로 온 작은딸 친구가 아이 둘이 학교에 있다고 말해줬고
지호엄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혜지 일기장 덕에 희미해진 기억이 되살아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