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친정엄마)♡

딸과의 전쟁이 드디어 시작되다

bell-10 2001. 2. 10. 20:00
고3이던 딸이 드디어 졸업을 했다.
이제는 예비대학생이다.
제깐에는 어른이 다 된 듯 착각 속에 살겠지만
한 살 일찍 입학한 덕에 친구들보다는 한 살 아래다.

졸업식이 있기 며칠 전 딸이 말하길
'친구들과 이제 만나기 힘들다,
이리저리 대학 찾아 헤어지면 언제 만나겠느냐며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서 커피숍에서 밤을 새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로서는 허락할 수가 없다,
늦게라도 집에 온다면 몰라도 밤을 새겠다니,
그리고 밤새 영업하는 커피숍이 어딨느냐'며 완강히 거절했더니
"엄마, 애들이 같이 놀다가 10시쯤에 집에 가야한다고 하면
날 외계인처럼 쳐다봐요. 다른 친구 엄마들은 된다는데 엄마는 왜 안돼요?
나만 왕따 당한단 말이에요"라며 난리였다.

남편은 나보다 더 완고한 사람이라 어림도 없는 이야기가 분명한데도
"그럼, 아빠한테 허락 받아라. 아빠가 허락하시면 엄마는 아빠 뜻에 따르겠다"고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에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딸아이가 허락을 구했지만 역시나였다.

아빠에게도 퇴짜를 맞은 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아빠가 허락 안 해준다고 하니
'그럼 들어가지 말고 그냥 있다가
핸드폰 오면 안 들리는 척하고 그냥 끊어버려!'라고 했어요"라고.
너무나 놀란 나는 "그래봐라, 너는 그날로 당장 쫓겨난다"고 엄포를 놓았다.

며칠 후 졸업식날 저녁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다는 딸에게
"버스가 끊어지면 엄마에게 전화해라. 데리러 갈게"라는 말로 허락 안한 미안함을 감췄다.

아이가 나가고 깜빡 잠이든 내가
전화벨 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전화 저쪽에서 딸은 "엄마,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라며 사정했고
나는 한시간만 더 연장해 준다고 했다.
그런데 벨소리에 함께 잠이 깬 남편이 아까 눈이 오더라는 것이 아닌가.
밖을 내다보니 다행히 눈은 그쳤지만 어둠 속에서도 사방이 눈으로 하얗고
차들이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을 하는 중이었다.

다시 딸에게 전화를 했다.
"너, 눈오는 줄 알았니?"
알았단다.
"눈오는 줄 알면 버스 다닐 때 집에 와야지, 지금까지 있으면 어떡하니,
이 눈이 얼어붙으면 엄마가 갈 수 없는데... 지금 당장 데리러 간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세상에... 눈이 얼마나 왔는지...
슬리퍼를 신은 발이 푹푹 빠져 양말이 다 젖고 만다.
차에 쌓인 눈을 대충 털어 내고는 조심조심 운전을 했다.
그래도 다행히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은 얼어붙지는 않았다.

아이와 약속한 지점에 이르니 벌써 길가에 나와 서있는 게 보였다.
아이가 차에 타는 순간, 이 무슨 냄샌가..... 이건?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면 그렇지, 커피숍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커피숍.
어디 호프집에서 시간을 보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마구 호통을 치기는커녕 부드러운 말투로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너, 술 먹었지?"
"친구들이랑 조금요..."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투다.
화난 내색을 안 하느라 속에서는 불이 났다.

딸의 이야기로는 한반 친구 12명이 함께 놀았는데
저를 포함한 4명이 집에 가고 나머지 8명은 계속 놀고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찌 부모된 입장에서 그냥 두고볼 수 있겠는가.

"거봐라, 집에 먼저 간 친구도 있잖니. 술 마시는 걸 어떤 부모가 잘한다고 하겠니?
술은 먹으면 느는 것이다. 여자 남자 가릴 것은 없지만 엄마는 아직은 술 마시는 거 반대다.
앞으로 술 먹을 기회가 생기겠지만 자제하고 말고는 네 몫이다.
대학가서도 아빠가 통금이 열 시라고 말했지?".....
아무튼 아이가 반발을 안 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고선
동네 어귀의 분식 집에 들어가서 뜨끈한 어묵을 함께 사먹고 돌아왔다.

사실 집에서 가끔 남편과 술이라도 한잔할 때면
일부러 아이들을 불러 한잔 해보라고 권한 적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막둥이 아들은 사내놈이라고
한 방울 먹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딸 둘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니.....

아무리 요즘 세대가 그렇다지만 다른 부모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딸이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알고도 밤을 새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을 거다.
요즘 아이들을 많이 이해해 주려고 생각하는 신식엄마이고 싶은데
막상 내 딸의 일이라니 그렇지 못하다.
이율배반적인 어른.
다른 아이들에게는 관대하고 내 아이에게는 엄한 엄마.

정말 이제부터 시작인가 보다.
딸과의 전쟁이......
얼마나 현명한 엄마가 될는지 막막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