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나의 예비고사 시절
bell-10
2000. 11. 7. 00:23
일주일후면 딸의 수능시험일이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12년동안 죽어라 공부한 결과가
단 하루만에 결판나는 날이니 해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한가 보다.
이십 칠년 전 우리도 수능 비슷한 예비고사라는 시험을 보았다.
지금의 수능은 그 점수의 높낮음에 상관없이, 대학에 떨어지고 말고는 나중의 일로,
원하면 모두에게 대학지원 자격을 부여하지만 우리 때의 예비고사는 그 시험 자체가 대학 진학의 갈림길이었다.
바로 대학입학자격시험이었던 것이다.
일정한 점수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예 지원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소위 명문학교라고 칭해지던 학교에서도 몇 명이 떨어져 대학입학원서도 못 내보고 예비고사 재수를 해야했다.
예비고사를 치던 날 고사장엘 갔었는데 대구에 있는 우리학교 학생들과
경북 상주의 모 여고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때 시절에는 펜팔로 편지동무를 많이 사귀었는데
그 학교가 나와 펜팔 하던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친구가 다니던 학교였다.
반가운 마음에 물어 물어 쉬는 시간 그 친구를 만났던 일이 새롭다.
서로 사진을 교환한 터라 만나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추억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때의 예비고사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그냥 통과의례의 하나였기에 그렇게 친구를 찾아볼 여유도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대학은 대학 자체의 본고사로 합격여부가 결정 나게 되어 있어
따로 평소에 공부를 많이 해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제도가 훨씬 합리적이지 않았나 한다.
일찌감치 자신의 학업에 대한 능력을 미리 파악한 후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대학진학이 분명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도 대학진학이 지상최고의 목표인양 공부에 혹사당하는 우리아이들의 현실.
사교육비의 지출이 학부모들의 허리를 휘청이게 한다.
일찍부터 조기교육이니 뭐니 서두르는 것도 결국은 대학을 잘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은 아닌가?
학교가 끝나면 한창 뛰어 놀 나이의 아이들이 학원가방을 메고 하루에 서너 군데의 학원을 다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정녕 하고싶어 스스로 가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의 교육제도가 만능 선수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물론 내신이라는 이름아래 예체능 모든 방면까지도
다 잘해야 하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허리를 졸라매고서라도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다해주려고 한다.
꼴찌없는 일등이 어디 있는가?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일등도 있는 법인데 모두다 일등이기만을 원하는 세상이다.
나역시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아이가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등이 아닌 비록 꼴찌라도 한 방면에 특별한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특별전형이라는 이름으로 명문대에 진학할 수는 있지만 진학한 후가 문제라고 한다.
한 방면의 소질을 계속 계발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해서인지 어렵게 진학을 하고도 자퇴를 하는 숫자가 많다고 한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뭔가 시작과 끝이 맞물리지 않은 듯한 일관성 없는 교육.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쓰다보니 백년은커녕 십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정책에 갑자기 화가 난다.
나의 예비고사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또 화가 난다.
치미는 화를 푸는 우리만의 방법- 커피 한잔에 수다나 떨러 가야겠다.
이름도 모르는 지금의 교육부장관(부처이름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자꾸 변하는 제도에 또 화가 난다)이 오늘의 메뉴인 건 분명한 사실이리라.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12년동안 죽어라 공부한 결과가
단 하루만에 결판나는 날이니 해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한가 보다.
이십 칠년 전 우리도 수능 비슷한 예비고사라는 시험을 보았다.
지금의 수능은 그 점수의 높낮음에 상관없이, 대학에 떨어지고 말고는 나중의 일로,
원하면 모두에게 대학지원 자격을 부여하지만 우리 때의 예비고사는 그 시험 자체가 대학 진학의 갈림길이었다.
바로 대학입학자격시험이었던 것이다.
일정한 점수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예 지원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소위 명문학교라고 칭해지던 학교에서도 몇 명이 떨어져 대학입학원서도 못 내보고 예비고사 재수를 해야했다.
예비고사를 치던 날 고사장엘 갔었는데 대구에 있는 우리학교 학생들과
경북 상주의 모 여고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때 시절에는 펜팔로 편지동무를 많이 사귀었는데
그 학교가 나와 펜팔 하던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친구가 다니던 학교였다.
반가운 마음에 물어 물어 쉬는 시간 그 친구를 만났던 일이 새롭다.
서로 사진을 교환한 터라 만나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추억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때의 예비고사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그냥 통과의례의 하나였기에 그렇게 친구를 찾아볼 여유도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대학은 대학 자체의 본고사로 합격여부가 결정 나게 되어 있어
따로 평소에 공부를 많이 해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제도가 훨씬 합리적이지 않았나 한다.
일찌감치 자신의 학업에 대한 능력을 미리 파악한 후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대학진학이 분명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도 대학진학이 지상최고의 목표인양 공부에 혹사당하는 우리아이들의 현실.
사교육비의 지출이 학부모들의 허리를 휘청이게 한다.
일찍부터 조기교육이니 뭐니 서두르는 것도 결국은 대학을 잘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은 아닌가?
학교가 끝나면 한창 뛰어 놀 나이의 아이들이 학원가방을 메고 하루에 서너 군데의 학원을 다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정녕 하고싶어 스스로 가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의 교육제도가 만능 선수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물론 내신이라는 이름아래 예체능 모든 방면까지도
다 잘해야 하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허리를 졸라매고서라도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다해주려고 한다.
꼴찌없는 일등이 어디 있는가?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일등도 있는 법인데 모두다 일등이기만을 원하는 세상이다.
나역시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아이가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등이 아닌 비록 꼴찌라도 한 방면에 특별한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특별전형이라는 이름으로 명문대에 진학할 수는 있지만 진학한 후가 문제라고 한다.
한 방면의 소질을 계속 계발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해서인지 어렵게 진학을 하고도 자퇴를 하는 숫자가 많다고 한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뭔가 시작과 끝이 맞물리지 않은 듯한 일관성 없는 교육.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쓰다보니 백년은커녕 십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정책에 갑자기 화가 난다.
나의 예비고사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또 화가 난다.
치미는 화를 푸는 우리만의 방법- 커피 한잔에 수다나 떨러 가야겠다.
이름도 모르는 지금의 교육부장관(부처이름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자꾸 변하는 제도에 또 화가 난다)이 오늘의 메뉴인 건 분명한 사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