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아줌마들의 '007 제임스 본드 팬 클럽' 창단

bell-10 2000. 8. 22. 12:37
아줌마 다섯이 모여 '007제임스 본드 팬클럽'을 창단하였다면 웃으시겠죠?
속사정은 바로 다음과 같답니다.

지난해 신발깔창, 무릎보호대 등을 생산하는 집 가까운 공장에 아르바이트로 취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일이 주로 접착제인 본드를 사용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다섯을 가리켜 본드클럽이라고 불러주었죠.
우리는 "그냥 본드클럽이 아니라 「007제임스 본드 팬클럽」으로 불러달라"며 너스레를 떨었고요.

아파트단지내 같이 사는 한 엄마의 남편이 경영하는 공장이 도로건너 있었는데 이 회사는 다행이 IMF터지고 매출이 더 올라 일손이 딸렸답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아파트 사는 친구에게 부업으로 일감을 부탁했고 부탁 받은 엄마는 집에서 노느니 친구도 도와주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란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감을 맡은 엄마와 같은 동에 살고 있어서 마침 그날 제가 그 집에 들렀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길래 냄새가 뭐냐고 했더니 자초지종을 말하더군요.
공기가 나오는 에어깔창인데 깔창바닥에 빨대 같은 호스를 넣고 다시 테이프로 덮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깔창에서 고무냄새 비슷한 설명이 불가한 역한 냄새가 난 것이지요.

3월이라 추운 날씨인데도 냄새가 나니까 베란다로 들고나가 이틀 작업을 했다는데 이미 냄새가 그 집 전체에 배여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죠."무슨 떼돈 번다고. 남편이 나갔다 오면 얼마나 싫어하겠느냐. 집어쳐라."
그 엄마는 "형님, 정말 냄새가 심한가봐요. 근데 다른 부업도 해봤지만 이건 돈이 제법 되는 거 같아요."라면서 시간당 돈을 계산해 주더군요.

그 당시 저도 틈틈이 머리핀을 실로 뜨는 코바늘 부업을 해봤었는데 가사 틈틈이 할 수 있다는 장점 빼고는 하루 오천원 벌기도 힘들더군요.
그런데 이 일은 하루 만원은 우습게 번다는 거예요. 집안 일 다하고 틈틈이 하는데도.
그래서 귀가 솔깃하더군요.
"그렇다면 무슨 방법을 찾아보자"며 궁리한 끝에 그 공장을 같이 찾아갔습니다.

잠깐 둘러본 공장 안은 그야말로 3D 직종 특유의 지독한 냄새와 열기로 저를 제외한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나가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니 직원이 들어와도 오래 있지를 않아서인지 외국인 근로자가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사장님과 의논해서 현장 안이 아닌 창고에 따로 장소를 마련하기로 하고 집에서 하듯이 만드는 수량만큼 임금을 받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오전만 나가기로 하고요.
저는 첫날은 물론 그후로도 일정하게 출근하는 일은 힘들만큼 다른 일이 바빠(화려한 백조의 고유임무) 시간 나는 대로 나간다는 호조건을 달았습니다.

며칠후 5명의 아줌마들중 3명 이상 매일 출근하는 조건으로 일당제로 변경되었다기에 저는 아예 나가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더니 '형님이 빠지면 재미없다, 못나오는 사람 있을 때 나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들이 한사코 그만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본드클럽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면 3일도 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1시까지 4시간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과 얼추 맞아 시간적으로도 적당하고, 차를 타지 않고 길만 건너면 되니 화장이니 옷이니 챙길 필요도 없고, 운 좋은 날은 그곳 직원식당에서(식당이래야 콘테이너 박스로 어설프지만 백금녀보다 더 뚱아줌마인 식당아줌마의 반찬 솜씨는 일품이었죠) 공짜 점심까지 얻어먹을 수도 있어 정말 생각보다는 신이 났습니다.

다만, 주재료인 깔창냄새와 본드 냄새가 너무 심해 마스크를 하고 작업해야 했고 본드에 검정색을 넣어 썼기 때문에 잘못 옷에라도 묻으면 절단 났습니다.

4월인 가부터 시작해서 여름철 비수기를 빼고 가을에 추석을 지나봤는데 추석 보너스라고 봉투에 오만 원씩을 넣고 식용유 한 셋트까지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절반도 못 다닌 전 너무 황송했지만 어쨌든 그 기분 캡이었습니다.
결혼 전 직장에서 책상만 지키는 너무 쉬운 일을 하면서 받았던 그 많은 소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금액인데도 땀흘리며 번 돈이라 그보다 몇십 배나 소중했습니다.

이런 기분 아시나요?
산업의 역군이 된 것 같은 기분요.

다섯명 중 제가 나이가 젤 많고 나머진 다 30대였는데 일하면서 젊은 엄마들의 깨소금 같은 사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솔솔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날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좀더 잘해주려고 마음먹기도 했으니 인생은 끝없이 배우며 산다는 말이 맞다는 걸 느꼈지요.

또 가끔씩 베트남 및 중국 근로자들과 손짓발짓 해가며 의사 소통하던 일도 재미있었고요.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과 헤어져 타국에 왔고 그 중에는 어린아이까지 떼 놓고 온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후 저는 이사를 해서 그 클럽에서 빠지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일이 없어 그만두었답니다.
본드처럼 딱 달라붙어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고 한 사이들이었지만 보지 않으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처럼 자주 만나지 않으니 접착력이 약화되는가 봅니다.

그래도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검정본드를 이리저리 묻혀가며 열심히 일하던 젊은 엄마들의 반듯한 정신이 대견하고 깔깔거리며 일하던 그 이쁜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