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월드컵때문에

bell-10 2002. 6. 19. 14:59
등교 준비하는 아들의 폼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붉은 악마 유니폼도 아닌 제 누나의 낡은 빨간 티를 걸쳐 입고
이마에는 붉은 색이 울긋불긋한 제 아빠의 등산용 머플러를 질끈 동여매고
그 위에 또 빨간 색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선 학교에 간다고 인사를 한다.

평소에는 다른 애들보다 튀어보려는 아이가 아닌데
요즘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자약한 아들의 모습.

그래, 이왕지사 그렇게 할거면,,,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가려는 아이를 붙잡아 앉혔다.
소위 말하는 페이스페인팅을 난생 처음 그려보려는 생각으로.

아이도 싫지 않은 지 얼굴을 들이밀어
때아닌 아침부터 얼굴을 도화지 삼아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화장을 잘하지 않는 에미라 그림도구가 부실했지만
입술라인을 그리는 연필로 한쪽 뺨에는 I ♥ KOREA
또 다른 뺨에는 파이팅!!을 그리기로 했다.

그런데 유식한 척 영어로 파이팅을 적다가
갑자기 스펠링이 헷갈리는 것이었다.
Fith... 아니 뭔가 이상해.
Fight... 이것도 이상하네.

그 보드라운 뺨에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보니
아이의 뺨이 성할 리 있겠는가.
벌개진 뺨을 어루만지며 "에이, 지우고 그냥 갈래요"하는 아들.

그래도 에미의 자존심이 있지.
결국 영어사전까지 들여다보고서야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의 의상을 미리 생각한 아들인지라
들뜬 마음에 일찍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까딱했다간 페이스페인팅이란 걸 하려다가
학교까지 지각시킬 뻔한 못 말리는 에미다.

훗날 이런 에피소드 역시 월드컵때문에 생긴 즐거운 추억거리가 아닐 수 없겠지.

이제 몇 시간 후면 16강전이 펼쳐진다.
오천만 국민의 염원이 이루어져 아주리군단 이탈리아를 꺾고
8강으로 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해도 우리는 한마음으로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동안 우리의 대표선수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기에.


***몇 시간 후***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가 이겼다.
그것도 2:1 역전승으로.
전반 종료 직전에 터진 동점골과
연장 후반에 터진 골든 골.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장하다, 대한의 아들들아.
다시 욕심이 꿈틀거린다.
가자, 4강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여,
기다려다오,
우리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