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고마우신 선생님

bell-10 2002. 5. 15. 13:38
스승의 날.
선생은 많아도 진정한 스승은 드물다고 할 정도로 師道가 땅에 떨어진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선생님들만 탓할 문제인가.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계시는 수많은 선생님들이
작금의 교육시책과 학부모의 과열된 자식사랑 앞에서 속수무책
마음대로 교육에 전념할 수 없는 실정은 아닌가.

스승의 날을 맞아 아주 오래된 기억을 하나 떠올려본다.
내가 중학교 진학하면서부터 아버지 사업과 함께 우리집 가세도 점점 기울어졌다.
엄마 말씀이 그 당시 일류라고 지칭되던 중학교 시험에 내가 합격하고 나니
딱 3일은 기분이 너무 좋으셨단다.
주위의 축하를 받느라고 정신 없이 3일을 지내셨는데
그 3일이 지나고 나니 슬며시 등록금이 걱정되시더란다.

아무튼 엄마의 변통으로 입학은 하였는데 늘 납부금 내는 날짜만 다가오면
걱정이 태산같았다.
돈이 없어 못 주시는 걸 뻔히 아는데 엄마께 말씀을 드려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늘 서무실에 불려갈 때까지 버티곤 했었다.
참, 그때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아버지의 무능함이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이 제대로 안 되는 아버진들 무슨 수가 계셨을까?
얼마나 처자식 보기가 힘드셨을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내 나이다.

아무튼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늘 납부금 때문에 쩔쩔매며 지냈다.
그런데 고2 담임선생님 덕으로 납부금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시절에는 가정방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선생님이 반 학생들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부모님도 만나보고
가정형편도 살피는 그런 제도였다.

잘 사는 아이들이야 선생님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런 제도를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싫었다.
내가 사는 가난한 모습을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보여드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사춘기 나이였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집을 다녀가신 담임선생님이 한번은 나를 부르시더니
동사무소에 가면 비과세증명이라는 걸 뗄 수 있으니
그걸 떼오면 수업료를 안 내도록 해준다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는 집을 자꾸 줄이고 또 줄여 남의 집에서 세를 살고 있었기에
비과세증명을 뗄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집 아이라는 증명서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엄마께서는 너무도 좋아하셨다.
그렇게 고마운 선생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시면서 당장 떼주셨고
그 이후로 졸업 때까지 수업료를 전액 면제받을 수 있었다.
물론 가난하다고 다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학교성적도 어느 정도 상위권이라야 가능한 일이라
자존심 빼면 시체였던 얄랑한 내 자존심을 덜 다칠 수 있었다.

수학여행 때였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여행비가 없어 못 가는 몇 명은
집에서 쉬는 게 아니라 수학여행 기간동안 학교에 나가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여행가서 재밌게 놀텐데 처량하게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안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또 부르시더니 여행비 걱정은 말고 수학여행을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가게 된 수학여행.
그일을 모르는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후회 없도록 재미있게 지냈었다.
우리 반에서는 빠진 친구가 없었으니 아마 선생님께서
다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을 것이다.

얼마 전 수학여행비 문제 때문에 선생님들이 궐기(?)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공짜로 여행 가기 싫으니 당당히 여행비를 내고 가게 해달라,,, 그런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여행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나와 내 친구들의 수학여행비를 대납하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선생님이시니까 선생님의 힘으로
몇 명은 공짜로 갈 수 있나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고마운 선생님께 졸업 후 편지 한 장 못 드리고 지내다가
졸업20주년 사은회 자리에서 처음 뵈었었다.
장년이시던 선생님께서는 초로의 신사로 변하셨던데
또다시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하셨을까?
해마다 배출시킨 수많은 제자들 중 과연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싶었는데
내 이름까지 기억하시던 선생님.
감사하다는 말씀을 한번도 드리지 못한 못난 제자를 기억해주심에 가슴 뭉클했었다.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마음으로나마 다시 한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