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의 이름으로♣

♥ 사랑을 먹고사는 花草 ♥

bell-10 2000. 6. 15. 09:17
아파트 베란다에 꽤 여러 개의 화분이 있습니다.
10여분의 난, 관음죽, 벤저민, 아스파라거스, 스킨다이비스,
러브체인, 허브, 게발선인장, 고구마,
심지어 아들의 학습 관찰용 강낭콩까지 종류가 다양합니다.

얼마 전부터 제 일과는 아침 일찍 베란다에 나가
이 화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섯달 전 추운 겨울 이사하면서 얼어죽었던 벤저민은
가지들을 다 쳐버렸었는데도 군데군데서 싹이 돋더니
전보다 더 푸른 잎들을 새로 난 연약한 가지에 매달고 있습니다.

누렇게 잎이 마르며 죽어가던 난들도 다시
돌틈사이로 새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물을 잘 주지 않아 말라죽었던 아스파라거스를
밑동까지 잘랐는데 그것 역시
새 가지를 뻗어내고 있습니다.

잘 생긴 고구마 하나로 싹을 내어 거실에서
수경 재배하던 것을 몇 가지 잘라 화분 속에 심었더니
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았습니다.

원래 물을 잘 주지 않아도 되는 게발선인장에
얼마나 물을 주지 않았던지
선인장 두께가 얇아져 피골이 상접(?)했었는데
그것 역시 통통 살이 오르더니 이제는
불그레한 새끼 선인장을 힘차게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긴 줄기가 메말라 잎을 다 떨구었던 스킨다이비스도
새로이 푸른 잎을 매달고 있습니다.

이렇듯 죽어가던 화초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기특해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눈병(?)이 생길 지경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화초마다 잎을 일일이 들춰가며
오늘은 또 어떤 새순이 돋아나 있는지를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지를 저도 몰랐습니다.
어린아이를 기르는 기분이랄 까요?

우리 집 화초들이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은
순전히 제 탓입니다.

지난겨울부터 이런 저런 핑계로 내팽개쳐 두고
생각나면 겨우 물 한번 찔끔 주곤 했으니까
사랑이 메말랐던 거지요.

추워도 거실에 들여 놀 생각도 않고
날씨가 따뜻해져도 집안에 먼지 들어올까 봐
베란다 문 한번 활짝 열어두지를 않았으니
얼어도 죽고 숨 못 쉬어서도 죽을 지경이었던 거지요.

어느 날 갑자기 먼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베란다에 나가 화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화초들이 모두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어디어디 할 것 없이 달팽이 껍질 같은 깍지벌레가
진드기처럼 들러붙어
화초들을 질식시키고 있었습니다.

누렇게 뜨거나 검게 변한 잎, 말라비틀어진 줄기......
그 동안 유기시켜둔 화초들이 죽음 직전에서
제 눈에 띄게 된 것이지요.

그게 바로 2주전.
부랴부랴 해충제거제를 뿌리고 영양제를 투입하고
물을 주는 등 응급처치를 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화초들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제 하루의 시작이 되어버렸습니다.

비록 2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를 돌보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전부터는 새순이 올라오고
잎에 윤이 조금 도는 것처럼 보입니다.
난 잎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줄 때에는
마치 어린아이 목욕시키는 기분이 듭니다.

친구 집에 있는 난들의 쭉쭉 뻗은 잎을
부러워 할 줄만 알았지 이렇듯
정성으로 키운 결과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겁니다.

막내아들의 학습 관찰용으로 심었던 강낭콩이
가느다란 줄기에 자그마한 꼬투리를 맺는가 싶더니
어느새 콩의 형태를 갖춘 꼬투리로 커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한지 이젠 아들도
매일 강낭콩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화초도 사람의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물이란 걸
이제서야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저 많이 우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