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10 2001. 12. 30. 11:19



"거기 000씨 댁이시죠?"
"네, 그런데요?"
"김치냉장고 배달해드리려는데 댁에 계실 건가요?"
"네에????"

김장한지 보름도 지난 어느 토요일,
사지도 않은 김치냉장고를 배달하겠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김치냉장고를 산 일이 없다고 했더니
전화번호가 xxx-xxxx번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름도 내 이름이 맞고 전화번호도 우리 집이 맞다.
순간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어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날 퇴근 무렵 사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내게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내일 어디 가? 집에 있을 거야?'
왜 묻느냐고 했더니 '근처에 볼일이 생기면 들릴까 해서'라고 했다.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사장이었다.
연말보너스로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면서 현금으로 주거나 미리 말을 하면
분명히 내가 거절할 것 같아 자기 맘대로 우리 집에 없는,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사보냈단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과하다.
아니다, 더 큰 거 해주고 싶었다.
받을 수 없다.
아니다, 내 마음이니 받아라....
몇 차례 실랑이 끝에 하는 수 없이 받기로 했다.
대신 더 열심히 일해주는 수밖에.

사실 그동안 김치냉장고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아 구입을 미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품이 뚜껑을 위로 열어제치게 되어있어
위 공간을 쓸 수 없는 점이 불편해 보였다.
서랍식이 나오기도 했지만 기능이 떨어진다는 입소문도 있었다.
모든 가전제품이 그러하듯 점점 개선된 제품이 나올 것이고
그때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하늘에서 떨어진 셈이다.

마침내 도착한 김치냉장고.
주부들이 구입한 후 가장 맘에 들어하는 가전제품이라고 한다.
만만찮은 덩치라 주방 쪽에 겨우 자리를 마련해 들인 김치냉장고.
바깥에 나갔다 들어온 남편에게 친구가 보냈다고 했더니
이렇게 큰 걸 뭐하러 왜 받느냐면서 버럭 화부터 내었다.
당장 돌려주라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러잖아도 막둥이 아들이 말썽이라도 피울라치면
그때마다 남편은 에미가 집에 없어 그런거라며 그만 두라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큰 선물을 받게되면 그만두게 하기가 쉽지 않으리란 계산이 선 건가?

하지만 어이하랴, 이미 배달되어 온 것을.
당장 김장김치를 옮기지도 못한 채 남편 눈치를 살피며 하루저녁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이왕 받았으니 잘 쓰겠다고 전하라는 남편.
'그럴 거면서 소리 지르고 성질을 내누,,,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속으로는 혀를 쏙 내밀었지만 그래도 이해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자기가 사줘야 하는 걸 다른 사람이 사줘서 자존심이 상했나?

아무튼 베란다 구석 스치로폼 상자 속에서 처량하게 지내던
우리 집 김장김치들이 일요일을 맞아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것도 최신 디지털 전자동 단독주택으로.
사장님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