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10 2001. 12. 16. 15:34


저녁 아홉시 넘어 퇴근한 날이었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꾸벅꾸벅 졸 것 같아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날 졸음이 오기는커녕 눈이 번쩍 띄는 광경이 바로 내 눈앞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내가 앉은 앞좌석의 앞좌석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연인 한 쌍이 앉았는데
앉은 모습이 영 눈에 거슬리는 거였다.
남학생의 어깨에 기댄 여학생의 어깨 위로 남학생이 팔을 걸친 건 기본이고
여학생의 볼에다 볼을 갖다대고 부비는 가 싶더니
급기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학생의 얼굴이 여학생의 앞 얼굴을 덮치려고 했다.
그때 자는 것처럼 보이던 여학생이 얼른 얼굴을 비키면서 남학생의 얼굴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참으로 목불인견.

같은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으로 그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버스 안에는 어린 학생부터 나이 드신 어르신까지 타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도 애써 모르는 척 외면을 하고 있었다.
내 바로 앞, 다시 말하면 두 남녀의 바로 뒷좌석에 젊은 청년 한사람이 타고 가다가 내리길래
얼른 그 자리로 당겨 앉았다.

내가 바로 뒤에 앉아 도끼눈을 뜨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낯뜨거운 자세로 자기의 애정을 표현하는 남학생.
별다른 저항 않고 기대고 있는 여학생.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오히려 내가 고민에 빠졌다.

잘못하다간 봉변을 당하는 건 아닐까?
그래, 곧바로 내리면 못 본 걸로 해야지....

하지만 여전히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쳐다보는 내 가슴만 쿵쾅쿵쾅 방망이질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건넨 말.
"저기, 학생들 맞아요?"
입을 가리고 속삭이듯 한마디 던졌더니 남학생이 "그런데요?"하며
여전히 여학생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이 아줌마가 왜 이래?' 하는 듯 뒤를 돌아다보았다.

"저기,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나도 학생들 같은 자식이 있어서 하는 소린데.....
학생들 부모님 앞에서도 이래요?
지금 다른 사람들 다 쳐다보고 있는데서 뭐 하는 거예요?
심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말을 하고있는 내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지만 이왕 시작한 말,
빠르고도 나직하게 쏘아버렸다.

다행히 염려한 것과는 달리 별달리 대들지도 않고
얼른 팔을 내리는 남학생과 자세를 고쳐 앉는 여학생.
'휴, 다행이다~~'
말을 마치고 나니 가슴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과연 내가 잘한 짓일까?
요즘 저런 풍경은 다반사라던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한 걸까?

집이 같은 방향인지 아니면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선 지
몇 정거장을 더 지나서 그 두 학생은 동시에 내렸다.
어른이 젊은이나 학생들을 꾸짖다가 봉변당하는 일이 허다하다는데
참 나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을 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할 일을 했다는 자만심도 슬며시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서 큰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고.
딸 가진 엄마로서 도저히 그냥 볼 수 없었다고.
같은 또래인 딸의 반응도 그 학생들이 좀 심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괜히 봉변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그러나 딸아~~~~.
이 엄마는 그런 경우 또 나설 것이다.
간 큰 여자, 용기 있는 아줌마가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용일지라도.